잊을 수 없는 야구왕 새철 페이지 Satchel Paige라는 제호의 1985년 글입니다. 한 때 시속 166km의 강속구를 자랑했던 새철은 마운드에서 익살을 부려 관중을 웃기는 일에도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오타니의 50-50이 화재인 지금 오래전 야구왕에 대한 글을 찾아봤습니다.
글쓴이
존 벅 오닐
캔사스시티 마너크스팀 일루수 출신 삼독, 1985 시카고캅스팀 선수 스카우트 담당
전문
(1985년에 소개된 이글에서는 새철 페이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문의 내용은 그 글에 표기한 그대로를 따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35년 여름, 당시 캔사스주 위치타에 있던 내 앞에 스타 한 명이 나타났다. 그 스타는 다름 아닌 르로이 새철 페이지라는 이름의 껑충한 투수였다. 페이지는 노스다코타주 비스마르크의 세미프로팀 소속으로, 과연 드물게 보는 스타답게 남달리 빠른 공을 던져 자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어쨌든 내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그와 나눈 악수였다. 그 뒤 47년간 나는 필드 안팎에서 새철과 고락을 함께 하며 그에게서 야구뿐만 아니라 인생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새철 페이지는 당시 흑인 야구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였으나 야구인의 영광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른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새철이 1982년 6월에 세상을 뜨자 그의 죽음은 커다란 뉴스가 되었다. TV 뉴스시간에 한 여자 아나운서는 이렇게 말했다. "새철 페이지가 이번 주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런데 오, 그는 정말 멋진 인생을 살았지요." 나 자신 그보다 적절한 말을 구사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론 그 여자 아나운서가 자신이 한 말의 뜻을 절반이라도 이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기의 눈을 맞힐 때까지."
새철 페이지가 유명한 야구선수가 될 가능성은 애초에 아주 희박했다. 1906년 7월 7일 앨라배마주 보밀에서 태어는 그는 11남매 중 일곱 번째 아이였다. 집이 하도 가난해서 새철은 일곱 살에 일을 시작, 기차역에서 개당 10센트를 받고 가방을 날랐다. 새철은 다른 아이들이 나르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르기 위해 짐나르는 장비를 한 가지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새철 트리"(가방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가족들의 벌이를 거드느라고 새철은 학교를 빼먹는 날이 많았다. 무단결석이 잦은 데다가 12살 때 어느 가게에서 장난감 반지 몇 개를 훔치다 붙잡혀 앨라배마주 마운드 메이그스에 있는 흑인청소년 직업보도학교로 보내졌다.
새철은 그 감화원에 들어갔던 일이 자신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늘 말했다. 보잘것없는 교육이나마 받을 수 있었던 곳도 거기고, 거기서 야구도 열심히 했다. 나중에 그에게 돈을 안겨 준 황금의 팔도 그 감화원 시절에 다듬어졌다.
1923년 17살 때 감화원에서 나온 새철은 어느 세미프로팀의 감독 앞에서 10개의 스트라이크를 연달아 던져 보여 그를 놀라게 했다. 그 팀에 발탁된 새철은 3년 후 차타누가 블랙 룩아츠팀에 입단,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풋나기인 그때에도 새철은 무척 자신만만 해 했다. 그러면서도 새철은 홈플레이트 뒤에 청량음료병을 줄지어 세워 놓고 하나씩 공으로 맞추어 쓰러뜨리거나 펜스에 뚫린 모자 크기의 구멍 속으로 공을 던져 넣는 연습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이러한 피칭 연습은 그의 말마따나 "모기의 눈을 맞힐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신중한 투구"
새철은 스포츠를 흥행사업으로 생각한 최초의 야구선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모빌에 있을 당시 키 192cm에 몸무게 82kg이었던 새철은 자기의 엉성한 신체조건이 관중들을 웃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마운드까지 걸어가는 데 온종일 걸릴 듯 발을 질질 끌며 감으로써 관중을 웃기는 "연기"를 완벽하게 해냈다. 그럴 때마다 타자들은 손에 쥔 볼이 왼발에 가려 안 보인다고 투덜댔다. 그는 익살을 즐겼으나 결코 게임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새철은 '영원히 볼을 던지리'라는 제목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웃음소리는 듣기 좋은 것. 나는 곧 더 많은 웃음을 자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공을 던질 때는 절대로 익살을 부리지 않았다. 나는 공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던졌고 그것은 반드시 내 의도대로 던져졌다."
내 기억에 새철의 강속구는 한때 시속 166km를 기록했다. 오늘날 메이저리그의 평균 볼 속도인 138km에 비하면 대단한 것이었다. 새철의 강속구는 한 가지 기묘한 데가 있었다. 타자들은 볼이 홈플레이트 위를 지나갈 때 공깃돌만 한 크기로 작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해철이 관중을 웃기려고 터무니없는 익살을 부리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중한" 볼 덕분이었다. 아무 추어 시절 자기 팀이 이기고 있을 때 새철은 외야수들을 불러들여 베이스 옆의 잔디 위에 앉아 구경이나 하라고 한 후 세 명의 타자를 연달아 삼진으로 잡곤 했다.
전설적인 대결
새철의 배짱은 1942년 피츠버그에서 그 진수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당시 일루수였던 나는 새철과 함께 캔사스시티 마너크스팀에 소속되어 워싱턴 홈스테드 그레이스팀을 상대로 흑인리그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새철에겐 홈스테드의 조쉬 깁슨 선수가 그 게임에서 가장 힘든 타자였다. 우리가 3대 2로 리드한 상태에서 9회에 들어갔다. 새철은 2명을 삼진으로 잡고 나서 3루타 한 개를 허용했다. 그는 마운드로 나를 불러 "낸시, 나는 다음 두 타자를 걸러 보낸 후 조쉬를 맞을 거야"라고 말했다. 낸시란 새철이 나를 부를 때 별명이었고 그는 친한 사람들을 제멋대로 이름 지어 불렀다.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새철이라고 해도, 선수권의 향방이 마치 가느다란 한 줄기의 실에 매달린 판국이었다. 고의 사구로 걸어 나간 선수들로 주자 만루가 된 상태에서 조쉬가 나설 차례였다. 새철은 조쉬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어이, 피츠버그 크로포즈팀에서 함께 뛰던 생각이 나나? 그땐 자넨 자네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타자라고 말했고, 나는 내가 세계 최고의 투수라고 말했지. 그리고 언젠가 한번 겨루게 될 것이라고 했지 안나?"
"그랬고 말고"
"자, 이제 때가 왔네."
관중들은 조쉬가 타석에 들어서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조쉬, 빠른 볼을 보내겠네."
퍽!
"스트라이크 원!"
"하나 더."
퍽!
"스트라이크 투!" 조쉬는 두 손바닥에 흙을 묻히고 나서 방망이를 단단히 쥐었다. 새철은 조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내가 어깨 쪽에서 스모크볼을 던질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두고 봐, 무릎 쪽으로 총알을 던질 테니." 다음 순간 "퍽"하면서 정확히 무릎 높이로 총알같이 빠른 볼이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쓰리!"
새철은 관중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마운드를 천천히 내려오더니 평소 입버릇처럼 되뇌던 말을 뱉었다. "어이, 낸시! 이 새철의 강속구는 아무도 못 친단 말이야!"
강속구를 던지며
그때까지 새철은 비오는 날만 빼놓고 19년 동안 거의 매일 볼을 던졌다. 캔사스시티의 날싸가 추워지면 그는 캘리포니아, 푸에르토리코, 쿠바 및 멕시코에 있는 팀에 고용되어 뛰었다. 새철은 자신이 통산 2,500게임에 출전, 2,000승을 거둔 것으로 추산했다. (나는 그가 비스마르크의 세미프로팀에서 뛰던 시절 무려 29일간 연속 피칭을 한 사실을 알고 있다.) 시즌이 끝나면 그는 백인 메이저리그 선수들과의 시범경기에 나서 자신이 디지딘이나 보비 펠러 같은 투수와 맞먹는 실력을 갖고 있음을 입증했다.
물론 당시의 새촐로서는 그것이 메이져 리그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사람들은 새철이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못해 괴로와한 것으로 짐작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에 출장하지 못해 잃은 것이 무엇인가? 돈? 천만의 말씀. 돈을 벌기 위해 비록 한 게임만 충장하는 계약이라도 마다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다녔지만 새철은 입장료 수익에서 일정 지분을 받아 연간 약 4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나중에 메이저리그팀에서 최초로 받은 연봉은 2만 5,000달러에 불과했다. 그 외에 또 무엇을 잃었는가? 최우수선수들과 겨룰 기회? 말도 안된다. 당시 오픈시즌 기간중 메이저리그의 백인팀들과 가진 경기를 분석한 결과, 흑인팀이 268대 168로 100 게임을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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