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Norma Jean Mortensen, 1926~1962)를 추억하는 어떤 기자의 1986년 글입니다. 지금은 마릴린 먼로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당시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서 경험한 내용을 이렇게 글은 많지 않아 공유합니다. 아래의 글은 1986년 1월에 나온 잡지의 글 전문입니다.
마릴린 먼로에 대한 기억 2번째
이 이야기의 앞 이야기는 이전 글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6.
한 번은 맨해턴에서 나하고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택시를 잡으려고 하자 마릴린이 말했다.”그러지 말고, 우리 걷도록 해요.”
“마릴린, 아마 팬들이 달라붙어 못살게 굴 걸?”내가 대꾸했다.
마릴린은 장난을 좋아하는 말괄량이처럼 씩 웃으면서 마치 우리가 10대의 남녀인 양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때의 모습은 샌들을 신고, 테니스용 반바지에 남자용 흰 와이셔츠를 밖으로 내놓은 채 스카프로 머리를 산 차람새였다. 색안경은 끼지 않고 있었다. “내가 스타인 체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아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게끔 내 스스로 만들지 많으면,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모를 거예요.”
7.
우리는 연예인들이 잘 이용하는 사디레스토랑 앞을 지나갔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유명인사를 쫓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들과 사인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지만, 아무도 마릴린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한 스낵바에 들어가서 마릴린은 크림치즈와 건포도빵 샌드위치로 간단한 식사를 했지만 역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는 6번가와 5번가, 매디슨가 그리고 파크가를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마침내 월도프타워스호텔에 있는 마릴린의 방으로 올라갔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얼굴과 몸매를 그동안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릴린이 지닌 천부적인 재능의 한 단면은 세트에서 어떤 장면을 여기 할 때보다 언제나 스크린에서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었다. ‘왕자의 무희’에서 황태후로 나오는 사이빌 손다이크 여사는, 마릴린이 세트에서 어떤 장면을 연기할 때는 그 장면이 언제나 몹시 따분해 보이다가도, 막상 그날그날 편집용 프린트를 영상해 보면 갑자기 스크린에서 강력한 힘이 뿜어 나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여사는 마릴린이 출연한 영화의 필름을 모두 구해다가 그 비결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 비밀을 알아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8.
그렇다면, 비평가들과 할리우드의 동료들에게 그토록 자주 멸시와 조소를 당했던 이 여자,그런 속에서도 진지한 역을 맡고 날카로운 감각의 감독과 일할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 했던 이 스타의 불후의 명성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마릴린은 가난과 슬픔 속에서 자라났기에, 그리고 자신밖에는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기에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1926년 6월 1일 사생아로 태어난 노마 진 베이커는 어린 시절의 대분을 보육원과 고아원에서 보냈으며, 오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마릴린 먼로가 되었다.
9.
세트장에 마릴린은 촬영에 앞서 뜸 들이는 시간이 길어 공연하는 배우와 감독을 미치게 했다. 영화배우들은 “액션”이란 소리만 떨어지면 즉각 어떤 장면-앞에 나오는 장면과 동떨어진 장면을 촬영하는 경우가 흔하지만-에라도 뛰어들어가서 연기하도록 훈련돼 있다. 그러나 마릴린은 그렇지 못했다. 빌리 와일더는 어떤 장면을 찍을 때 촬영 횟수를 거듭하면 할수록, 다른 공연자들은 지쳐서 녹초가 되어 버리는데도 마릴린은 점점 더 연기를 잘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그게 바로 마릴린의 체질이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일상생활의 아주 간단한 연기를 하는 데도 평생이 걸릴 것같이 보이기까지 했다. 마릴린은 늘 시간을 못 지킨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번은 촬영소장이 마릴린의 지각하는 버릇에 대해 호통을 쳤다.(그 당시 촬영이 하루 취소되면 영화사는 약 1만 8,000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그러자 마릴린은 뽀로통해져서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왜 그러세요, 재너크선생님. 제가 늦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너무 일직 오는 거란 말이에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삼킬 뻔했다.
10.
마릴린과 얼마 동안만 같이 있어도, 나는 그 신비로운 매력에 넋을 잃고는 나도 모르게 시간을 초월한 마릴린의 세계로 끌려 들어가곤 했다. 그런 순간이면, 마릴린은 집 없는 방랑자일 수도 있었고 남자를 유혹하는 요부일 수도 있었다.
마릴린의 그런 면을 나는 어느 무더운 7월의 오후 맨해턴에서 겪은 적이 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정확히 오후 3시 30분 마릴린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고 문밖에 서서 기다렸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두 시간 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더니 그제야 인터뷰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마릴린은 열쇠를 더듬어 찾더니 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서 내가 메모를 하는 동안, 마릴린은 거실의 두툼한 방석에 앉아 발톱에 메니큐어를 칠하고 있었다. “굉장히굉항히 덥군요.” 마릴린이 불쑥 말했다. “침실로 가서 얘기를 계속하는 게 어때요? 거긴 에어컨이 있거든요.”
11.
나는 ‘7년 만의 외출’에 나오는 유얼이 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앉고, 마릴린은 침대 위에 팔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에어컨을 매우 세게 틀어 놓았는데도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방안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좀체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다 침대 옆벽에 걸려 있는 큼지막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 위대한 노예해방자는 마릴린의 영웅이었다. 초상화는 크고 진지한 눈을 가진 열정적이고 고상한 모습의 젊은 링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꼭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인터뷰를 계속했다.
12.
1953년에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본 마릴린의 눈빛은 1962년 마릴린이 수면제 과용으로 죽기 몇 주일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역시 변함이 없었다.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마릴린의 몸이 너무나 여윈 것이었다. 그 여자의 생애는 너무나 많은 슬픔으로 점철되어 왔던 것이다. 두 번의 결혼-야구 슈퍼스타 조 디마지오와 퓰리처상을 받은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결혼-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불임교정수술을 받았는데도 아기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잡담을 나누는 동안, 마릴린은 타고난 수다쟁이로 되돌아갔다. 자기가 새로 산 집의 객실을 장식 중이라면서, 처음 맞을 손님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전기작가 칸 샌드버그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13.
우리는 작별의 키스를 나누었다. 링컨도 아마 눈감아 주었을 그런 키스였다.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1962년 8월 6일 일요일, 마릴린 먼로는 그날 아침과 전날밤 사이의 알 수 없는 시간에 숨을 거두었다. 한동안 마릴린은 미국의 꿈-남자건 여자건, 사회의 어느 계층에 속하건, 아무리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하더라도, 굳은 의지로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을 스스로 체현해 보인 여자였다. 맑은 눈을 반짝이는 숱한 아가씨들이 맨스차이니스극장 밖에서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이라.
마릴린 먼로는 오늘의 이 젊은 아가씨들의 것이다.. 50년대와 60년대에 그 눈부신 존재에 감응한 우리 모두의 것이었듯이. 마릴린의 영화를 대할 수 있는 한, 이 여배우는 우리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살아 있을 것이다.
https://ko.englishcentral.com/video/4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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